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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래된 사진이다. 2010년 8월 영월고등학교에 근무시절 교육지원청에서 추억의 사진전에 필요한 사진을 보내라는 공문을 보고 학교를 뒤져 찾은 사진이다. 교련과 관련된 사진을 블로그에 올렸던 기억이 나서 다시 찾아냈다. 이런 사진을 보고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면 오래된 사람이다.
학창 시절이 누군가에겐 돌아가고 싶은 추억의 시절이지만 많은 이들에겐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이기도 하다. 추억 여행이란 제목으로 옛날 교복이나 교련복을 대여해 주는 관광지가 있다. 옛날에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못 다녀 입어 보지 못했던 이라면 모를까! 저런 옷을 다시 입고 싶은 까닭을 모르겠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과 느낌이다.
일본 강점기 느낌이 팍팍 나는 까만 교복을 중학교 일 학년 때 입었다. 아침에 교문을 통과하는 일이 고역이었다. 양쪽에 늘어선 교사와 선도부의 매서운 눈에 적발되는 사안이 한둘이 아니었다. 복장과 두발 모든 것이 규제 대상이다. 심지어 '거수경례'를 하며 외치는 목소리까지 만족시켜야 했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입대한 다음에 경험한 병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도부가 나오기 전에 교문을 통과하기 위해 새벽같이 등교해야만 했다.
'말죽거리 잔혹사'란 영화가 있었다. 영화 속 풍경은 과장이 아니다. 나중에 교복 자율화가 되었을 때 정말 기뻤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교련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월요일엔 애국 조회 토요일엔 교련 조회가 열렸다. 애들이 픽픽 쓰러져도 계속되는 교장 선생님 훈화보다 힘든 것은 바로 교련 조회가 끝나고 이어지는 분열이었다. 오와 열을 맞춰서 사열대를 지나며 '우로 봐'를 하는 분열은 군인들도 신병교육대에서나 하는 일이다. 필자와 같은 세대는 대학생도 교련을 받았으니 나중에 군대 문화가 마냥 낯설지는 않았다.
따져보니 중고등학생의 두발은 1981년에 교복은 1982년에 자율화되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이 환심을 사려는 속셈으로 펼친 정책일 것이다. 하지만 1996년 교사가 되었을 때 학교는 다시 두발과 복장을 단속하고 있었다. 학생주임 줄여서 이른바 '학주'로 불리는 교사가 주축이 되어 교문 단속을 펼치고 있었다. 다른 어떤 일보다 아이들 머리카락 길이와 색깔 그리고 치마 길이 따위를 단속하는 일이 싫었다. 대충 흉내만 내다보니 학생주임과 다른 반 담임 교사에게 눈총을 받았다. 그때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싸우지 않고 시혜처럼 얻어낸 자유는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반항아로 찍히는 걸 감수하고 부딪혀 싸운 학생들 덕에 이제 겨우 우리나라에 두발과 복장 단속이 사라져 가고 있다.
같은 일을 하는 교사를 80년대는 학생과장, 90년대엔 학생주임, 이제는 학생부장이라고 부른다. 2년 전 학생부장을 맡아 달라는 관리자에게 교문 단속은 하지 않겠다는 단서를 달고 맡았다. 요즘 교권 추락의 원인을 학생들 두발과 복장 지도를 하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과연 아이들 인권을 희생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싶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상투적인 구호가 생각난다.
며칠 전에 에스토니아 교육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으로 보였는데 교실에 있는 학생은 열 명 남짓이었다. 서로 짝지어 앉아서 몇몇은 칠판 앞에서 서로를 가르치고 있었다. 교사는 정답만큼 답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수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확인할 수 없지만 저런 교실에선 교권 침해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학생 인권 보장을 주장하는 전교조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묻는다. 막고 차고 돌려쳐! 교련 조회를 아는가? 머리에 물 들였다고 뺨을 맞아 본 적이 있는가?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란 말의 뜻을 아는가? 모른다면 말을 하지 마시라.
이 땅의 학부모에게 부탁합니다. 아이를 맡아 가르치는 교사를 감시하고 욕하고 비난만 하지는 마세요. 당신의 아이가 행복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려면 당장 교육부 장관과 대통령에게 학급당 학생 수를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고 외치세요. 학교는 작아야 좋습니다. 경험에 비춰보면 한 학년에 4~6학급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학급당 학생 수가 반으로 줄면 아이들은 교사에게 네 배의 눈길과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학교 폭력도 거의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삼스럽게 옛날 사진을 다시 올리는 까닭은 학생 인권 조례 때문이다. 학생 인권을 지나치게 보장하기 때문에 교권이 추락했다는 소리를 하는 이들이 보인다. 그것도 제법 책임 있는 중요한 자리에 있는 이들도 있다. 교권 침해를 전하는 기사 밑에 전교조를 탓하는 댓글이 달리고 있다. 교사로서 막무가내인 학생을 다룰 방법이 없어서 답답한 마음에 가끔 속으로 '옛날 같으면 너는 이렇게 까불지 못했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난날의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학창 시절이 누군가에겐 돌아가고 싶은 추억의 시절이지만 많은 이들에겐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이기도 하다. 추억 여행이란 제목으로 옛날 교복이나 교련복을 대여해 주는 관광지가 있다. 옛날에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못 다녀 입어 보지 못했던 이라면 모를까! 저런 옷을 다시 입고 싶은 까닭을 모르겠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과 느낌이다.
일본 강점기 느낌이 팍팍 나는 까만 교복을 중학교 일 학년 때 입었다. 아침에 교문을 통과하는 일이 고역이었다. 양쪽에 늘어선 교사와 선도부의 매서운 눈에 적발되는 사안이 한둘이 아니었다. 복장과 두발 모든 것이 규제 대상이다. 심지어 '거수경례'를 하며 외치는 목소리까지 만족시켜야 했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 입대한 다음에 경험한 병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도부가 나오기 전에 교문을 통과하기 위해 새벽같이 등교해야만 했다.
'말죽거리 잔혹사'란 영화가 있었다. 영화 속 풍경은 과장이 아니다. 나중에 교복 자율화가 되었을 때 정말 기뻤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교련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월요일엔 애국 조회 토요일엔 교련 조회가 열렸다. 애들이 픽픽 쓰러져도 계속되는 교장 선생님 훈화보다 힘든 것은 바로 교련 조회가 끝나고 이어지는 분열이었다. 오와 열을 맞춰서 사열대를 지나며 '우로 봐'를 하는 분열은 군인들도 신병교육대에서나 하는 일이다. 필자와 같은 세대는 대학생도 교련을 받았으니 나중에 군대 문화가 마냥 낯설지는 않았다.
따져보니 중고등학생의 두발은 1981년에 교복은 1982년에 자율화되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이 환심을 사려는 속셈으로 펼친 정책일 것이다. 하지만 1996년 교사가 되었을 때 학교는 다시 두발과 복장을 단속하고 있었다. 학생주임 줄여서 이른바 '학주'로 불리는 교사가 주축이 되어 교문 단속을 펼치고 있었다. 다른 어떤 일보다 아이들 머리카락 길이와 색깔 그리고 치마 길이 따위를 단속하는 일이 싫었다. 대충 흉내만 내다보니 학생주임과 다른 반 담임 교사에게 눈총을 받았다. 그때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싸우지 않고 시혜처럼 얻어낸 자유는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반항아로 찍히는 걸 감수하고 부딪혀 싸운 학생들 덕에 이제 겨우 우리나라에 두발과 복장 단속이 사라져 가고 있다.
같은 일을 하는 교사를 80년대는 학생과장, 90년대엔 학생주임, 이제는 학생부장이라고 부른다. 2년 전 학생부장을 맡아 달라는 관리자에게 교문 단속은 하지 않겠다는 단서를 달고 맡았다. 요즘 교권 추락의 원인을 학생들 두발과 복장 지도를 하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과연 아이들 인권을 희생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싶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상투적인 구호가 생각난다.
며칠 전에 에스토니아 교육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으로 보였는데 교실에 있는 학생은 열 명 남짓이었다. 서로 짝지어 앉아서 몇몇은 칠판 앞에서 서로를 가르치고 있었다. 교사는 정답만큼 답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수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확인할 수 없지만 저런 교실에선 교권 침해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학생 인권 보장을 주장하는 전교조를 비난하는 이들에게 묻는다. 막고 차고 돌려쳐! 교련 조회를 아는가? 머리에 물 들였다고 뺨을 맞아 본 적이 있는가?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란 말의 뜻을 아는가? 모른다면 말을 하지 마시라.
이 땅의 학부모에게 부탁합니다. 아이를 맡아 가르치는 교사를 감시하고 욕하고 비난만 하지는 마세요. 당신의 아이가 행복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하려면 당장 교육부 장관과 대통령에게 학급당 학생 수를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고 외치세요. 학교는 작아야 좋습니다. 경험에 비춰보면 한 학년에 4~6학급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학급당 학생 수가 반으로 줄면 아이들은 교사에게 네 배의 눈길과 관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학교 폭력도 거의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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