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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여행

여행 계획을 엑셀로 짜는 친구

글: 논어일기 2024.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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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 사는 아주 오래된 친구가 있다. 89학번 대학 동기이니 무려 35년 전에 만난 친구다. 친한 친구이지만 성격은 나와 크게 다르다. 무계획의 계획을 주장하는 나와 달리 매사를 꼼꼼한 계획으로 실천하는 친구다. 굳이 마이어스-브릭스 성격 지표(MBTI) 유형으로 따지면 각각 P와 J의 전형이다.

지난주에 갑작스럽게 안산에 사는 친구와 부부가 함께 속초 여행을 가기로 했다. 화요일에 갈 테니 같이 보자고 했더니 카톡방을 개설하고 촘촘하게 짠 여행 계획을 올린다. 친구가 정한 시각에 보이스톡이 왔다. 셋이 같이 통화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J형인 친구는 여행 계획을 엑셀로 만들었다. 일정마다 시작과 끝나는 시각 그리고 필요한 예산까지 꼼꼼하게 기록하였다. 추천 맛집 가운데 엄선한 식당으로 대기 시간까지 고려하여 장소와 메뉴를 정하고 만일을 대비한 대안까지 있다. 화요일 12시 30분부터 수요일 13시까지 완벽한 1박 2일 속초 여행 계획이다. 마치 학교에서 세운 수학여행 계획처럼 느껴진다.

P형인 나는 꿈도 꾸지 못하는 계획이다. 한창 휴가철이니 고속도로가 매우 붐빈다. 애매한 시각에 출발하면 길에서 시간을 버리고 약속된 시각에 도착하기 어려울 듯해서 아침 일찍 떠나기로 했다. 일찍 도착했을 때 약속 시각까지 할 일을 생각하다가 자전거를 가져가기로 했다. 동해안 자전거길이 좋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청초호 ⓒ 박영호

 
대충 여섯 시에 출발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평소처럼 눈을 뜨니 이미 여섯 시가 훌쩍 넘었다. 짐을 챙기고 나니 일곱 시가 넘었으나 다행히 수도권에서 출발한 이들이 원주까지 오기엔 이른 시각이라 영동고속도로는 한산하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자전거길을 검색해서 영랑호 둘레길을 돌기로 했다. 소문대로 영랑호 둘레길은 참 좋은데 생각보다 거리가 짧아서 두 바퀴 돌고 중간에 있는 농원에 들러 작은 수국 축제도 즐겼다. 동네 찜질방에서 간단하게 씻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12시 20분이다. 이만하면 성공이다.
 

 영랑호 ⓒ 박영호

   

 영랑호 건너편 멀리 울산바위가 보인다 ⓒ 박영호

   

 영랑호 ⓒ 박영호

   

 수국 축제 ⓒ 박영호

     

 영랑호 자전거길 ⓒ 박영호

   
이제 완벽한 가이드인 친구가 세운 일정을 따르면 되므로 맘이 편안해진다. 맛있는 회국수로 점심을 마치고 외옹치항에 있는 산책길인 '바다향기로'를 한 바퀴 돌았다. '바다향기로'는 예전에 군부대가 있어 접근할 수 없던 곳이다. 아직도 일부분에는 철책을 남겨 두었다. 햇살이 뜨거워서 처음에 힘들었으나 차츰 시원한 바닷바람이 땀을 식혀주어서 좋았다. 멀리 보이는 속초 해수욕장 주위로 고층 건물이 들어서 해운대와 느낌이 비슷해지고 있다. 
 

 바다향기로에서 바라 본 속초 해수욕장 ⓒ 박영호

 

다음은 청초호에서 속초 해수욕장 앞에 있는 섬까지 배를 타는 일정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코스였다. 바다 위에서 육지를 바라보며 시원한 바람까지 즐기니 더할 나위 없이 즐겁다. 배를 태워준 이는 친구의 지인인데 바이크와 캠핑카도 가지고 있다니 부럽기 짝이 없다. 아마도 이렇게 속초 앞바다를 돌아볼 기회는 다시 없을 듯하다. 요트를 타는 이들이 느끼는 즐거움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청호동 갯배 ⓒ 박영호

   

 청초호에서 바라 본 아파트 ⓒ 박영호

   

 바다 위에서 바라 본 속초 해수욕장 ⓒ 박영호

   

 속초 해수욕장 앞에 있는 섬 ⓒ 박영호

   

 등대 ⓒ 박영호

     

 요트를 즐기는 사람들 ⓒ 박영호

 

    
새로 개발된 대포항에서 신선한 회와 맛있는 대게로 저녁 만찬을 즐기고 백사장을 따라 산책을 즐기고 수제 맥주도 한잔 마시고 첫째 날을 마무리했다. 둘째 날도 정해진 시각에 기상해서 계획에 따르다 보니 어느새 헤어질 시각인 13시가 되었다.
  

 대포항 내항 ⓒ 박영호

   

 대포항에 있는 호텔을 보니 마치 외국에 온 느낌이다 ⓒ 박영호

   

 속초 해수욕장 관람차 ⓒ 박영호

   

 울산바위가 보이는 창 ⓒ 박영호

     
속초는 멀어서 자주 오기 쉽지 않으므로 우리 부부는 1박을 더하기로 했다. 점심 먹고 친구들과 헤어지고 난 다음부터 일정은 오롯이 내가 세워야 한다. 다행스럽게 저녁 맛집은 친구가 이미 이름난 생선구이 집을 추천해 주었다. 

급하게 예약한 숙소는 15시가 넘어야만 체크인할 수 있다. 헤어진 시각인 13시부터 두 시간을 보내야 한다. 일단 어제 자전거를 매어 둔 영랑호로 갔지만 너무 햇살이 뜨겁다. 아내는 차에서 쉬고 혼자서 잠깐 타면서 사진을 몇 장 더 찍었다.

영랑호에 있는 부교를 철거해야 한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아직은 그대로 있다. 다리 위를 자전거를 타고 건널 수 없고 끌고 가야 한다. 영랑호 옆에 아주 멋진 범바위가 있다. 범바위에 올랐던 기억은 나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내려다본 풍경은 기억나지 않는다. 혼자서 오르려니 귀찮게 여겨져 발길을 돌렸다.

 

 영랑호 부교 ⓒ 박영호

   

 범바위 ⓒ 박영호

 

영금정에서 가까운 숙소에 짐을 풀고 쉬다가 17시쯤 자전거를 타고 고성으로 향했다. 청간정까지 타기로 했는데 안내판에 있는 천학정도 좋아 보인다. 거리는 4km라 만만하게 보고 나섰는데 조금 가파른 고개도 있고 쉽지는 않다. 돌아오는데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져 친구가 추천한 식당까지 가면 문을 닫을 무렵이다.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갑자기 튀어나온 차를 피하다가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 결국 저녁 시간을 놓쳐서 숙소 근처에서 생선구이를 먹었는데 맛이 그저 그렇다.
 

 동명항 ⓒ 박영호

   

 청간정 ⓒ 박영호

   

 청간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 박영호

    

 고개에 대전차 장애물이 있으니 안보관광 느낌이다 ⓒ 박영호

 

 천학정 ⓒ 박영호

   

 천학정 아래 기암괴석 ⓒ 박영호

 
생각보다 아내가 많이 다쳐서 애초에 계획한 아침 라이딩은 포기했다. 여행을 마치고 기행문을 쓰면서 되돌아보니 반성할 점이 많다. 다음 여행은 친구처럼 완벽한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다짐한다. 여행할 때 혼자가 아니라면 철저한 J형이 되어야겠다.

속초는 산도 좋고 바다도 좋다. 이제는 즐길 거리도 많다. 이번 여름 휴가지로 속초를 선택하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해돋이 ⓒ 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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