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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팔일편 21장

글: 논어일기 2020.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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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公 問社於宰我 宰我對曰 夏后氏 以松 殷人 以栢 周人 以栗 曰 使民戰栗 子聞之 曰 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咎

애공 문사어재아 재아대왈 하후씨 이송 은인 이백 주인 이율 왈 사민전율 자문지 왈 성사불설 수사불간 기왕불구

애공이 사()에 관하여 재아에게 물었다. 재아가 답하여 말했다. "하후씨는 소나무를 썼고, 은나라 사람들은 측백나무를 썼고, 주나라 사람들은 밤나무를 썼습니다. 밤나무를 쓴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전율(戰慄)케 하려 함이옵니다." 공자께서 이를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내 이미 이루어진 일은 말하지 않으며, 끝난 일은 간하지 않으며, 이미 지나가버린 일은 탓하지 않겠다."

애공은 19장에 나온 정공의 아들로 공자 58세 때 즉위한 노나라 군주다. 재아 이름은 재여(宰予)이고 자는 자아()인 공자보다 약 29세 어린 제자다. 말을 잘하고 머리가 좋아 영악한 인문이었는데 공자가 재여를 꾸짖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이 장은 그중 하나다. 말장난으로 어린 군주에게 공포 정치를 가르치는 재아를 꾸짖은 장면이다.


재여은 말솜씨가 날카롭고 말을 조리 있게 잘하였다. -<사기> [중니제자열전]

재여주침(宰予晝寢)재여가 낮잠을 잤다. -[공야장] 9


사(社)는 큰 나무를 상징으로 삼는 토지의 신으로 사직단과 같은 곳으로 추측된다. 사직단(社稷壇)은 임금이 백성을 위해 토지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다. 사극에 많이 나오는 '종묘사직'에 있는 사직이다. 신령스러운 나무와 그 주변의 땅에 담을 둘러 사(社)를 만들었다.

밤()과 벌벌 떠는 율()은 그저 소리만 같은 것인데 백성을 전율케 하려고 밤나무를 심었다고 말장난을 한 것이다. 이 장에서 도올 만화 논어엔 대추와 밤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자세하게 적었다.

옛날 우리나라 혼례는 신부집 마당에서 식을 올렸으나 요즘은 대부분 예식장에서 치룬다. 예식장에서 잘못된 풍습이 둘이 있다. 하나는 신부 아버지가 신부를 이끌고 나와서 신랑에게 건네주는 부분인데 중세 봉건시대에 여자를 소유물로 여긴 데서 비롯된 잘못된 풍습이다. 다른 하나는 폐백을 하면서 대추와 밤을 던져주는 풍습이다.

폐백은 신부가 결혼 후 처음으로 시부모를 뵐 때 큰절하고 올리는 음식이다. 폐백으로 대추와 밤을 올리는데 발음이 통하는 물건으로 신부의 다짐을 전하는 것이다. 대추()=조() ,밤(栗)= 율().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열심히 일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모든 일에 조심스럽게 임하겠다는 뜻으로 아들 딸 많이 낳는 것과는 무관하다.

주자가례에서 혼례 예식은 아래와 같이 나누었다.
의혼: 혼인을 의논함
납채: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혼인을 청함
납폐: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혼인 예물을 보냄
친영: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옴

유교 종법제도가 일찍 자리잡은 중국에서는 결혼이 철저하게 남자 가문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중기까지 그렇지 않았다. 고구려 시대부터 있던 데릴사위제인 서옥제를 따랐기 때문에 남자가 장가가는 결혼이었다. 장인, 장모 집으로 장가간 남자가 자식을 낳고 충분히 자란 다음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되돌아 오는 풍습이 있었다. 우암 송시열은 옥천 외가에서 스물아홉 살때까지 지냈고 율곡 이이도 강릉 외가에서 자랐다.

 


혼례는 여자가 남편 집으로 가는 것인데, 나라의 풍습이 옛 습관에 젖어서 친영하는 것을 모두 싫어하므로 태종께서 혼례를 바르게 하시려다가 이루지 못하셨던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 7년 5월


이런 것을 보면 유교도 사실 우리나라 전통이 아닌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 분명하다. 서옥에 머무는 기간이 조선 후기에 한 달로 줄고 일제 강점기엔 9일로 해방 후엔 3일로 줄었다고 한다. 요즘은 다시 서옥까지는 아니지만 시댁이 아닌 친정에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는 일이 더 많아 보인다. 아무래도 육아나 가사를 맡기기엔 시어머니보다 친정어머니가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여자들은 예로부터 당당하고 권위가 있었다. 과부의 재혼 금지도 성종 8년(1477)에서야 결정되어 <경국대전>에 실렸고 <분재기>들을 살펴봐도 17세기 말 이전까지는 여자도 동등하게 재산을 물려받았다. 조선 전기에는 족보에 여자의 이름도 올랐으며, 제사도 자녀들이 번갈아가며 지냈다.

이제 유교를 따르지도 않는 사람들이 애꿎은 며느리 시집살이를 시키고 있다면 크게 반성할 일이다. 그리고 이제 시집이냐 처가냐를 따지지 말고 결혼한 부부는 육아이건 가사이건 따로 독립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한다. 이다음에 우리는 지금 부모님들처럼 자식을 위해 희생만 하고 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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