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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술이편 14장

글: 논어일기 2022.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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冉有曰: "夫子爲衛君乎?" 子貢曰: "諾. 吾將問之."

염유왈 부자위위군호 자공왈 낙오장문지

공자께서 위나라에 계실 때 염유가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위나라 군주 첩을 도우실까?" 자공이 말했다. "글쎄, 내가 한번 여쭈어볼게요."

入曰: "伯夷叔齊, 何人也?" 曰: "古之賢人也."

입왈 백이숙제 하인야 왈 고지현인야

들어가서 여쭈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현자들이지."

曰: "怨乎?"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

왈 원호 왈 구인이득인 우하원

자공이 다시 여쭈었다. "후회했을까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후회하긴, 인을 구해서 인을 얻었는데 또 뭘 후회해?"

出曰: "夫子不爲也."

출왈 부자불위야

자공이 방에서 나오면서 말하였다. "선생님께선 아무도 돕지 않으실 것 같아요."

세자 괴외가 어머니 남자를 쫓아내려다 실패하고 도망간 뒤 위령공이 죽은 것은 BC 493년, 이후 괴외가 아들인 첩을 몰아내고 다시 쿠데타에 성공한 것이 BC 480년이다. 이 시기가 공자가 유랑한 시기와 겹친다. 자기 엄마에게 대항하다 도망간 과외는 정통성이 없고 아버지 왕위 계승을 막은 첩도 정통성이 없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상나라 말기의 형제로, 끝까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지킨 의인으로 알려져 있다. 백이와 숙제에 관한 이야기는 《사기》의 열전에 나온다. 백이와 숙제는 원래 서쪽 변방에 살던 형제로, 변방의 작은 영지인 고죽군의 후계자였다. 고죽군의 영주인 아버지가 죽자, 이 둘은 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끝까지 영주의 자리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 이때 상나라의 서쪽에는 훗날 서주 문왕이 되는 희창이 작은 영주들을 책임지는 서백의 자리에 있었다. 희창이 죽고 그의 아들 희발(서주 무왕)은 군대를 모아 상나라에 반역하려 했다. 희발의 부하 강태공은 뜻을 같이하는 제후들을 모아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을 찾아와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전쟁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효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신하 국가이다. 어찌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려는 것을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 이에 희발은 크게 노하여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 했으나, 강태공이 이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라 하여 죽음을 면했다. 이후 희발은 상나라를 토벌하고 주나라의 무왕이 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상나라가 망한 뒤에도 상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으며, 고죽군 영주로 받는 녹봉 역시 받을 수 없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었다. 이때 왕미자라는 사람이 수양산에 찾아와 백이와 숙제를 탓하며, “ 그대들은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더니 주나라의 산에서 주나라의 고사리를 먹는 일은 어찌된 일인가. ” 하며 책망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고사리마저 먹지 않았고, 마침내 굶어 죽게 된다. 이후,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는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충절을 지킨 의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어, 중국 문화권의 문헌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다.  위키백과

기사를 보니 김종인 씨가 이재명 후보가 만나자고 하면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것이 놀랍다. 임금이 싫다고 산에 들어가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 이야기는 와닿지 않는다. 좀 지나친 고집이나 아집 정도로 보인다. 하지만 시류에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것도 모자라 저쪽에서 버림받은 형편에 이쪽에서 만나 달라고 하면 만나주겠다는 사람은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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